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거룩하신 예수님을 죄 많은 인간이 마음대로 다루며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넘겨졌습니다.(마태 17,22)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에게, 생명의 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에게(마태 20,18), 하느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요한 18,31), 세상의 권력자 빌라도에게(마태 27,2)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능욕하고 십자가에 못박을 군인들에게 (마태 27,26) 넘겨졌습니다. 죄많고 허무한 인간이 구세주 예수님을 마음대로 처분하였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이 인간의 손에 넘겨지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죄의 현실과 예수님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담한 인간의 행위는 죄의 무서운 힘에 대한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의 무거움, 죄의 절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의 두렵고 무서운 힘을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표면상으로는, 예수님은 인간의 죄의 힘에 굴복되어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받아들릴 수 밖에 없는 무능한 분으로 보입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앞에 잠자코 서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 53, 7).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주도하는 것은 죄많은 인간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스스로 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내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전체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함께 주도한 사랑의 사건입니다. 신적 사랑의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에 의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신뢰하며, <예>하고 대답하시며, 인간을 위한 사랑의 행위, 희생과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이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세상의 죄와 죽음, 그 세력은 모든 힘을 잃게되며, 그 사랑의 힘에 의해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담한 사람들의 죄의 권세는 패배로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인간에게 계시하고 인간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에 의해,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화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살펴보면, 인간은 스스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끼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투쟁하는 인간으로 나타나며, 사회 안에서 끊임없는 불안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격리된 인간, 자기만을 주장하는 고립된 인간의 상황이며, 죄의 물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셨고, 우리를 모든 사람들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2 고린 5, 18-21).
    십자가는 사랑의 사건이며, 화해의 사건입니다. 인간이 그동안 높이 쌓아올린 장벽, 모든 장벽을 허물어 버린 사건입니다. 이러한 장벽을 허물어야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고, 우리 인간들 사이에 정말로 인간다운 관계가 맺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화해로 인도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은 인류의 구세주, 사랑의 하느님으로 계시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마주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 (마르 15,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