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누구나 많습니다. 인간은 이것에 대한 욕망이 엄청납니다. 요즘 웰빙,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죽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곧 손에 잡을 듯이 하는 선전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죽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얻으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현대 세계는 우리를 시간 속에 사로 잡아놓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서 성당에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대표적입니다.
영원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까? 잘못하면 현실에 무관심하게 하고 인간을 소외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건강하게 영원에 관심을 가지면 ‘희망’을 간직하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인생은 더욱 행복해집니다.
문제는 영생에 대한 욕구로 그 해결책을 구하는데, 헛다리짚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 율법교사는 매우 모범적으로 살아왔고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해 온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은 내 자신 안에 있는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아무리 인간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해도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뛰어넘어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인간은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난 존재, 즉 시작이 있기에 인간 자체가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을 하는 것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쟁취할 수 있나요? 그 누군가로부터 그 영원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구하려고 많은 애를 씁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이십니다(참고 요한 20,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수 있습니다.
3.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란?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죽고 난 다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영원한 분이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씀대로, 그분을 닮아서 사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1)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어떻게? 연인들이 사랑하듯이, 부부가 사랑하듯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자식이 부모에게 참으로 효도하듯이, 진한 우정을 간직한 친구들이 사랑하듯이...
사랑의 원동력인 하느님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그 사랑을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모범이 십자가에서 울려퍼집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참 사랑,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세상에서 강도 만나서 쓰러진 것 같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강도 만나서 다 죽어가면, 나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그 강도만난 사람이 나 자신인가요? 그런 나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포기하고 그냥 지나쳐 가겠는가? 나는 이 각박한 세상에 태어나서 강도만난 사람처럼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나의 상처를 보살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3) 강도만나서 상처받고 쓰러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시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나뒹굴러져 있습니다. 관심을 갖고 다가가고, 보살펴주고 진심으로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오늘 강도만난 사람은 누구인가? 비인간적인 무한경쟁 시대에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당장 피해를 보는 사람도,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그 강도를 만나서 쓰러진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회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사회는 두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서로 문을 닫아걸고 살고 있습니다.
4. 누가 이웃인가?
예수께서 추구하는 복음적 인간, 새 인간은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같은 사회 조건에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그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 예닮영성 심화길잡이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