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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자신을 만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느님께 가는 단 하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한14,6).
그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삶의 길에
세 단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곧 ‘나’와 ‘너’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은 ‘나’입니다. 그런데 이 ‘나’가 온전치 못하다는 데에 우리들의 문제의 출발이 있습니다. 온전한 내가 되지 못하니 온전한 ‘나와 너’가 되지 못합니다. 나와 세상의 온갖 문제들이 거기에서 불거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나가 되어 진정한 ‘나와 너’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요? 우리들의 존재의 근거요 원천이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관계의 출발점은 ‘나’요 그 종착점은 ‘하느님’입니다. 하지만 ‘나’가 진정으로 이 관계의 출발점이 되려면 관계의 종착점 ‘하느님’이 역설적으로 그 관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한없이 능가하시는 그 하느님이 어떻게 내 인생길의 출발점이 되실 수 있는지요? 하느님 친히 당신을 우리에게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한가운데에 강생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주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또한 몸소 걸어가신 그 삶의 길에서 우리가 진정 ‘나’를 찾고 ‘너와 나’ 그리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아’ 만나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나는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나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나 자신’이 되기까지는 너무도 길고 긴 과정입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말을 우리가 듣습니다. 실상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늘 보다는 더 나은 ‘내일의 나’가 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무엇이 나를 그렇게 부추기는지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한 나는 ‘참된 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삶을 기뻐하고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허상의 나’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태어나 성장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삶의 목표를 만들어 내고, 불필요한 방어기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어떻게 ‘허상의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요?

여러 가지 상처들이 나를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 상처들이란 내 삶을 왜곡시키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그림자들입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그림자들을 드리우는 그 어둠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가 저마다 감추고 있는 어떤 상실의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인생길에 우리가 실상 두려움과 불안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친 삶의 파고 앞에서 어쩔줄 몰라합니다. 기쁨과 평화를 잃을까, 행복을 빼앗길까 우리가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을 안고 구세주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분이 내 삶을 비추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큰 도움은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듯이 예수님은 삶의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오늘도 나를 부르십니다. 그분 앞에서 내가 얼마나 헐벗고 가난한 존재였는지 불현듯 깨닫게 하시며 묵은 삶의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부르십니다. 세리 마태오처럼 나 또한 그분께 상처 입은 나의 자유를 기꺼이 내어맡길 때에 예수님은 나를 진정 나 자신에게로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우리’ 만나기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너’가 필요합니다.
‘나와 너’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아담이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에서 그가 고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와를
아담의 협력자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저마다 그 누군가의
‘너’가 됩니다. 가정을 이루고 친구가 되고 더 큰 ‘나와 너’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나는 분명 너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탈출기의 한 대목처럼
그 홀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충만 된 존재,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나의 너’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강생하신
구세주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가 온전한 ‘나와 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천상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실 때가 되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
성삼위 하느님의 그 사랑의 일치가 우리들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제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관계의 순수성을 이루어 낼 수도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병든 관계를
치유해주시고 구해주셔야 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삶의 길을
우리 또한 걸어가야 합니다. 삶을 기뻐하고 견디어내며 승리하게 하는 그 모든
힘과 지혜가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케오를
받아들이셨고 죄녀를 용서하셨으며 살인강도를 천국으로 부르셨습니다.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지 말고 ‘낯선 너’에게 다가서는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그러자 그들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기쁨으로 다시 하나 되어 모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느님’ 만나기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들은 종종 그렇게 묻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행동을 낳는다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시편 14,1)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그들이 무탈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어가는 것 같으니 이를 보는 이들의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엄청난 불행을 만난 의인 욥의 경우 앞에서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반신반의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기대에 어긋날 하느님이라면 그분에게서 돌아서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행에 쉽게 휘둘리며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만날 하느님이라면 나는 아직 ‘참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셈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말했듯이 우리의 영혼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앎과 깨달음을 한없이 능가하시는 그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요? 하느님 친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 가운데 강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다른 하느님을 찾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구세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부르십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오시는 그분을 나는 믿음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과 눈길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데 그분을 어찌 알아볼 수 있는지요? 그분의 시선을 얻어야 합니다. 그분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그르침, 그분의 행적 안에서, 그분의 자기 비움의 십자가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시선으로 나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가운데 나 또한 그분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 17,26)

이 길을 걸어 기쁨과 평화 가득한 삶을 살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