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에 사는 처녀인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십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렛 3,1) 무엇이나 다 정해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때와 인간이 생각하는 때는 다를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대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건네주시는 순간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지켜보고 그 요청에 순응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새롭게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여섯째 달”이라는 특별한 때에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님께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편에서 계획하신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편에서 그분의 초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차원에로의 선택을 요구받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순간에 마리아님은 마음의 눈을 열어 놓으셨기에 천사가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루카 12,37)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자신에게 건네지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처럼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즉 하느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2. 마리아님은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분, 성령의 현존으로 감싸인 분이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일러줍니다. 그런데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사람,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어느 순간에나 주님께서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삶은 우리에게 많은 걱정꺼리와 불안감을 가져다주지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삶의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가져다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내적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은총 안에 사는 사람,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두려워하지 마라.”는 표현은 놀랍게도 성경에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봉사자로 뽑힌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일러주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의 사명을 확고히 해주며,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도록 위로하며 보호해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레 갖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바람일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신앙의 참된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외적인 주변 상황을 변화시키시기보다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또한 그분이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물론 신앙이 모든 고통과 난관을 제거해주거나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은 온갖 어둠을 다 몰아낼 수 있는 빛은 아니더라도,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는 인생 여정의 등불이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3.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마리아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묻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오며 겪어왔던,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수용할 수 없었던 힘겨운 순간에 품었던 의문과 애절한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해결책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칠흙같이 어두웠던 순간, 신앙인으로서의 의무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충실히 살아왔던 나에게 일어난 불행과 고통 앞에서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때야말로 침묵 가운데 식별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침묵 안에서의 식별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인간적인 연약함으로는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손길을 느끼고 그분께 대한 굳건한 신뢰를 갖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한 인간으로 모습으로 마리아님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한없이 작아지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한 사람 앞에서 당신 자신을 이처럼 비우시고 작아지셨기에, 마리아님은 Magnificat을 통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하느님을 크시게 하옵니다(찬송합니다).”

2016년 6월 11일 백남일 요셉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